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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1
버스에서 내린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이유라 할 것도 없는 울음이었다. 골목길에 내리깔린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며 저녁 안개를 닮은 공기 속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발끝에 닿는 자갈 소리는 차갑고 공허했다. 억지로 눌러온 감정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듯, 몸은 가볍고 마음은 끝없이 무거웠다.
인적 드문 골목을 지나, 다세대 임대주택의 공동 현관 앞에 다다랐다. 이젠 낡은 유리문… 손가락 끝으로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는 동안, 나는 마치 지난 세월을 불러내는 주문을 외는 것만 같았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싸늘한 형광등 불빛이 나를 맞았다. 안쪽 복도는 오늘따라 눅눅했고, 가득 찬 우편함에는 말라붙은 전단지가 마치 깃발처럼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이제 이러한 부재의 증거만이 나를 맞이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로 접어들었다. 문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그중 하나가 내게 남겨진 문이었다. 문 앞에 서는 순간,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목울대를 옥죄었다. 손에 잡힌 문고리는 차갑고, 오랫동안 사람의 체온을 잃은 쇠붙이의 쓸쓸한 감촉을 전해왔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집 안 공기는 지난 세월 그대로 얼어붙은 듯 나를 삼켰다. 불을 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실 한쪽에 밀려 있는 낡은 행거와 때 묻은 벽지, 손때 묻은 플라스틱 탁자와 그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잡동사니들. 하나같이 싼 물건들이었고, 그 흔적들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죄스러움을 느꼈다. 부모님께 남은 것이 결국 이런 싸구려뿐이었음을, 그들이 평생 모아온 삶의 결이 고작 이 허름한 것들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 그냥 바닥에 앉았다. 두 해 동안 방치해 둔 집이었다. 짐을 옮길 곳도, 마음 붙일 곳도 없어 차마 손대지 못한 채 방치했던 시간. 그 시간이 무심하게도 이 집을 조금 더 낡고 쓸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창틀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고, 벽지는 습기에 눌려 군데군데 일어나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내 무능과 나태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득 내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누구 하나 의논할 이도 없는 외아들.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홀로 남았다. 살면서 곁을 지켜줄 무언가를 마련하지 못한 채, 늘 미루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무너진 기억들 속에서 그 모든 결과를 혼자 짊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에 들어서니, 오래된 무기력증이 다시 몸을 감쌌다. 한때는 나 자신을 변명하듯 위로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힘겨웠다. 그저 나를 연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했다. 이 싸구려 물건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부모님의 흔적을 이렇게 방치해 둔 나라는 인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따금, 살아가는 일이 그저 습관으로 버티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 젖곤 했다. 오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벽지 위로, 지난 세월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속에서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를, 어머니의 따스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사라진 메아리일 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집 안을 채운 정적은 돌처럼 무거웠고, 나 자신조차 그 정적의 일부가 된 듯 느껴졌다. 누구 하나 불러줄 이 없는 이름, 기대어 울어줄 어깨 없는 삶. 그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달래듯, 그러나 끝내 달래지 못한 채 눈을 감아본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허무함이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싸구려 물건들, 오래된 정적, 그리고 무기력하게 버텨온 나. 그것들이 이 집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함께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2
거실 한편의 싱크대에 한동안 시선을 머물렀다. 싸구려 합판으로 짜인 싱크대 위에는 오래전에 멈춰버린 시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때가 얼룩진 그릇, 변색된 나무 도마, 금이 간 플라스틱 바가지. 그 속에서 나는 불현듯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요리를 해 본 적 없던 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떠난 뒤로는, 스스로 밥을 차려 드셔야 했다. 불 앞에 서 계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낯설고 서툴게 쌀을 씻곤 하셨다. 물속에 손을 담그면, 마치 작은 물고기들을 놓칠세라 조심스레 휘저으셨다. 물을 버리다 쏟아진 쌀알을 허둥대며 주워 담으시던 모습. 나는 그 장면이 왜 그리도 서글펐는지, 그저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국을 끓이실 때면 늘 간을 맞추지 못하셨다. 짠맛과 싱거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마지막엔 그냥 체념하듯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이가 안 좋아 늘 오래 불린 쌀로 진밥을 짓고 그마저도 조심스레 오래 씹으시며, 식사 후에는 늘 소화제를 드셨던 모습들. 그 고단한 노년이 내 심장을 두드린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밥상 위에서 매일 확인해야 했던 아버지. 그러나 그 빈자리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없는 찬에 밥 한 그릇으로 하루하루를 넘기셨을 그 모습. 나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때도 지금도 표내지 못하는 낮은 한숨을 가슴 깊이 새겨 넣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주인 없는 싱크대는 비어 있고, 냄비와 그릇들은 먼지 속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남은 아버지의 뒷모습은, 여전히 나를 불러 세운다. 나는 다가가 고개를 숙여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릇에 스민 기름때와 손때마저도 아버지의 외로운 저녁 식탁을 증언하는 듯하여, 눈앞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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